사람은 과연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가? 우리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회사라는 법인에 몸을 담고 있으며 일종의 계약관계 혹은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회사에 의존하는 것이 맞는 건가, 회사에서 일을 시키고 우리는 그것을 주체적으로 하기를 원하지만 과연 주체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법인의 가치와 혹은 윗사람의 니즈에 맞게 맞추며 맞추며 일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의 주체성과 자유가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일의 능률과 성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인간의 기본권은 자유를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1. 신에 의한 역사
그리스로마 신화는 아마 인간이 가진 역사 이야기 신화 이야기 가운데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이면서 사람과 인간의 특성을 잘 설명해주는 재미는 이야기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많이들 접해 본 내용이다. 사람은 신과는 절대로 떨어뜨리고 독립적으로 살 수 없는 것인가, 온갖 동굴 벽화에 보면 하늘과 우주 자연 그리고 심지어 맹수, 곰 등을 신격화하여 신들의 노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집을 짓고 무리를 지으며 살아온 인간인데, 그만큼 이성적인 존재인데 왜 그토록 독립적이지 못하고, 벽화를 기리며 기우제를 지내고, 병을 고치려 해도 무당이나 제사장에게 도움을 부탁하였다. 전혀 이성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 시대 사람들이 옆에 맹수나 새들처럼 무지하거나 지능이 더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토록 이성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인간들인데 왜 신을 찾았던 것인가.
2. 신에 의한 전쟁
인간의 전쟁은 신을 위한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 오랜 전쟁 100년 전쟁, 십자군 전쟁 역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났다. 각자 이성적이고 독립적인 주체인 인간이 자신의 이로움보다는 신성모독을 이유로 백년간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금도 아프간지역을 비롯한 중동아시아 쪽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종교적인 이유로 스스로의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일으키고 있다. 전쟁뿐 아니라 미국에서는 교인들이 집단적으로 자살하는 전대미문의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것 역시 신의 이름을 모독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이 되지 않는 교인집단은 단체로 자살로서 메시지를 전달하자는 것이었다. 아이들과 어른 모두가 함께 동시에 자살하였다. 이성을 가진 주체적인 인간이 맞는가.
3. 인간의 허약함
남극을 도전하고 달에 사람을 보내어 정복을 하고, 바닷속을 탐험하는 것이 아이러니 하게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신의 이르을 모독 했다고 하여, 자신의 자녀들과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이 또 인간이다. 남극을 정복하러 가기 위해 탐험대를 이끈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 경은 극한의 환경 속에서 전원 생존 복귀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으로 불리며 기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은 동물들이 가지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희로애락에서부터 분노, 기쁨, 슬픔, 불안함, 공황장애 등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와 자시 속의 또 다른 자아와 부딪힌다. 이것은 분명 4발 달린 짐승과는 다른 모습이다.
4. 감정의 인간
감정을 가진 인간은 모성애로 불길속의 자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온갖 루머의 고통 속에서 진실이 아닌 소문에 지치고 지쳐서 사람은 감정과 우울증에 치닫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런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사람들은 비이성적인 행동을 한다. 복잡계 인간이 가진 여러 요소 중에서 감정은 단연 복잡계 영역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고 한다. 우리는 지나가는 어린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면 아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 순간 모든 사람은 아무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않고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어렵고 위험한 순간에 누군가를 구하러 들어가는 것은 이성적인 영역보다는 감정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감정의 영역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우리는 전쟁과 죽음, 비이성적 행동을 하는 듯하다. 회사에서의 퇴사도 대부분이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짜증이 몰려올 때 퇴사를 결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5. 신이 없는 인간
현대는 과거보다는 신의 힘과 존재가 약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사람들에게 수백년전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말하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인간의 존재는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차라리 신들이 있다고 하여 그 신들은 너희들을 지켜주는 위대한 존재다라고 하면 인간은 거기에 의존하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지금은 그런 의존적인 생각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강조하고 스스로 살아감을 강조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현대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가치와 돈의 힘이 없는 사람은 자존감이 떨어지게 되고 감정이 지하 깊어 들어가게 되면 안 좋은 결론이나 공황장애등 정신적인 장애를 겪게 된다. 차라리 중세시대처럼 가난해도 가족들이 모여 앉아 빵하나를 나누어 먹고 기도를 하는 편이 정신적으로 풍요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 적어도 목숨을 유지하는 힘을 준다.
신도 없고 나도 없는 신간이 되어 버렸다. 오로지 나 혼자 스스로 나만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하지만 Capotalism의 세상에서 돈의 가치는 신보다 강하다. 이제 우리의 가치는 경제성이 있니 없니로 판단이 되고 그것은 곧 부의 유무,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냐 없냐에서 나의 가치를 평가하게 된다. 또 역시 누구나를 객관적인 지표로 평가하는 것이다. 기댈 곳도 없다. 중세시대 처럼 돈이 없어도 기도만 외우면 다음세상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아무런 약속도 업속,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을 담보할 수 있는 부의 약속도 없다. 오로지 혼자 스스로 극복해야 한다. 누가 극복할 수 있을까 온갖 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강조하고 책을 집필하였지만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작가도 있고, 그런 정신적인 힘은 아무나 가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되고 자립할 수 없으면 기대어야 하고, 기댈 수도 없는 포스터모더니즘 사회의 행복은 과연 추구할 수 있는 것이고, 가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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